독일 베를린 생활 블로그

기세

2021-07-25

 

 

‘기세가 중요하다’고 기생충에서 기우(최우식)가 그랬다.

 

처음 1년

처음 1년간은 괜찮았다. 남편은 이미 독일 출국 전 취업을 했다. 스타트업 회사라서 다른 사람보다 일은 많이 하는 것 같았지만 한국보다 적게하는 듯 했다. 그래도 덕분에 비자 문제로 걱정할 일과 고생은 없었다. 나는 아들이 유치원에 입학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있었고, 괜찮았다. 아침 7:30에 1살 아이와 함께 한 시간 거리를 몇 개월간 다니며 독일어를 배웠다. 토요일에는 영어를 배웠다. 2년차에는 대학원에 갈 참이었다. 가끔 마음에 걸렸던 것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몸이 아팠다는 것 뿐이었다.

 

2년과 3년차

그러다 2년차 때 아래층에 온 새로운 이웃이 아이의 낮시간대의 소음에 대한 불만을 호소 했다. 첫 불만을 시작으로 불만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이웃은 매일 같이 하루종일 베이스음을 높여 온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음악을 크게 틀었다. 그런식으로 우리에게 보복했고, 그로 인해 나는 이명이 생겼다.

그 다음에는 우리 문을 발로 차고 난리를 쳤다. 경찰에 여러 번 신고했다. 나는 경찰에게 우리 죽은 다음에 해결할꺼나고 까지 말했다. 경찰에게 그 말을 한 당일, 결국에 이웃은 계단으로 내려가는 남편 뒤에서 발로 남편을 밀어버렸다.

이 일로 우리는 독일에서 대법원까지 갔다. 독일에 정착한지 1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 일이 생긴 후로 나의 독일 생활은 우울과 불안이 치달았다. 특히 두번째해와 세번째해는 도대체 어떻게 지냈는지 거의 기억에 없다.

집에 대한 불안감으로 새집을 구할 때까지 한국에 피난을 했다. 한국에 다녀와서는 새집에서도 다시 에너지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긴장감은 그렇지 않아도 있었을테지만, 그 일로 내 몸에서 약했던 부위는 더 약해지고 침대에 누워야 되는 날은 더 많아졌던 것 같다.

드디어 두번째 해 가을 부터 아들이 유치원에 등교하기 시작했고, 나도 독일어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같이 독일어를 배웠던 친구들과 점심을 먹거나 시간을 보내고 집에 오면 항상 그날 저녁은 두통이 심했고, 체를 했다. 단순히 몸이 약해져서라고 생각했는데, 폭력적인 사건에 휘말린 이후로 이전보다 더 커다란 긴장감을 몸에 달고 살았던 거 같다. 남편은 이직을 했고, 다시 한 번 이사를 하게 되었다.

 

4년차

나는 네번째 해에는 드디어 새로운 걸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들은 유치원에 다니고, 나는 이미 C1까지 해두었다.

다들 Ausbildung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나는 네번째해에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했다. 이유는 자주 아픈 나를 내가 믿을 수 없어서 였다. 또 나로 인해 다른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싫었다.

그리고 네번째 해에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아들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 1년 6개월만에 다시 집에 눌러있게 되었다.

코로나와 아이가 집에 있음에도 네번째해를 보내고 있는 지금, 이제야 나는 조금 안정된 느낌이 든다. 새로 이사 온 집의 이웃들도 좋고, 집도 따뜻하다. 이웃들은 서로 도우려고 한다. 국적은 인터네셔널 하다.

독일어는 실생활에서 거의 안 쓰게 되지만, 내가 하는 독일어를 사람들이 이해한다. 내가 필요한 일상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묻거나 찾을 수 있고,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5년차에는 나도 기세를 잡고 싶다.

다섯번째 되는 해야 말로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것 같다. 작년에 한국을 다녀왔을 때 한의사가 그랬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도 알 수 없는 마음의 병으로 아픔을 호소한다고 말이다.

작년에서야 비로소 내가 자주 아팠던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된 느낌이었다. 예민한 내 성격이 한 몫 더 했을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외국에 사는 것은 그런 거 같다. 그것이 적응이라는 이름이건, 평안이라는 이름이건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좀 호된 신고식을 치르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나도 기세를 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