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생활 블로그

Vorphysikum : 물리만 남음.

2022-09-01
훔볼트 도서관에서 잠깐 쉬면서 찍은 사진 1

Vorphysikum 마지막 시험인 Physik만 남았다.

공부할 수 있는 기간은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 세번째 시험이었던 Zoologie가 끝나고 일주일만에 말하기 시험으로 본다.

물리는 1학기에 공부를 했고 시험도 봤고, 범위도 다른 과목보다는 넓지 않기 때문에 난 다시 보면 다 기억이 떠오를줄 알았다. (외국인이고 나이도 많고, 애까지 있는 사람이 무슨 자신감인가.) 그래서 시험 끝나고 아들과 시간도 보내고 좀 쉬었다.

그런데…. 그런데…. 설마했는데…

어? 내용들이 엄청 새롭다. 얘들아, 너네 1학기에 본 애들 맞니? 그동안 컸니?

훔볼트 도서관에서 또 잠깐 쉬면서 찍은 사진 2
훔볼트 도서관에서 도대체 주말에 뭐하고 있는거냐며… 나가고 싶어서 찍은 사진 3

아무튼 물리시험 공부는 다른 과목에 비해 집중이 너무 안 된다. 아들은 초등학교 입학해서 뭔가 행사도 많고, 아들친구들 생일파티도 너무 많고, 우리 아들도 내일 생일이다. 생일파티를 해준 적도 없고, 작년에는 수술 때문에 생일도 같이 지내지도 못한 탓에 이번에는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다. 생일파티 한다고 연락만 했는데도 할 일이 많다.

그건 그렇고, 이거 몇 개월동안 시험공부만 계속하고, 공부한 거에 비해서 점수는 그냥그냥 나오니 뿌듯하지가 않다. 외국인이고 나이도 많고, 애도 있는 사람이 성적 욕심까지!!!

오늘 화학 결과가 나왔다. 아..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한국 형식의 객관식, 주관식 위주의 쓰기시험이니까 1 맞을 줄 알았는데, 2 였다. (참고로 Vorphysikum 성적은 1,2,3,4로만 나오고 그 이하는 과락이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왜 이렇게 시험보는 기술도 없나. 외국어도 그랬다. 한국사람은 문법 잘하는데, 문법도 못했다. 아무튼 나는 시험 준비한 것에 비해 점수가 너무 냉혹하여 공부할 맛이 나지 않는다. 1년 간 체력도 능력도 안 되면서, 공부한다고 폼 잡고 앉아있었던 것 같긴한데…. 허무하다.

이제 물리만 보면 방학이니, 보고 싶었던 책들과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들 하고 싶다. 여행도 가고 싶다.

내가 이런 마음이 들 때 두고두고 읽어두려고 허준이 교수가 서울대학교 졸업생들에게 한 연설사의 일부를 저장해두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허준이 교수, 연설사 중 일부, 2022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 이십대에게 한 이야기를 보며, 단단히 마음 먹기로 다짐한다.

아주머니 지치지마세요. 잘 해내고 계십니다.